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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r black is among the most malleable of pigments; among the most vexing, too.

Seojung Art Gangnam

Seoul, Korea

2022

very color has its potentialities and drawbacks. Travel around the world and a specific hue will accrue a multiplicity of sometimes contradictory associations. It’s a wonder, in fact, that an artist can endow a specific hue with anything re - sembling full intentionality. Red, for instance, varies wildly in its symbolic asso - ciations depending on where on the globe you’re setting foot. Likewise, purple is a tone that can encompass a variety of heady connotations. And so it goes for any color that can be located on the painter’s color wheel.

 

Then again, black isn’t on the color wheel, nor is its opposite, white. Given that neither registers on the visible spectrum of light, black and white aren’t colors at all--or so those who make physics their stock-in-trade insist. Painters know better: black and white are there, stubbornly ensconced on the palette as agents for shifting value, yoking space and garnering attention. Which isn’t to say that artists are in agreement on their aesthetic efficacy, particularly when it comes to black. Leonardo da Vinci didn’t much care for it. Auguste Renoir, on the other hand, dubbed black the queen of all colors. And Henri Matisse? He likened its “force” to music.

 

Black has long been a constant--indeed, an inescapable presence--in the paint - ings of Jungwon Phee. Other colors filter through his art: slurs of rich rusty brown appear in the canvases, often as a coefficient to the blocks of iridescent gold that punctuate them. But black is predominant, and not a hue Phee takes lightly.

 

In a series of studies done on canvas, collectively titled “Archival Painting,” he created a daunting inventory of surfaces and variations of color, experimenting, all the while, with texture and viscosity. Phee’s sketchbooks--labyrinthian accu - mulations of notes, marks, stains and other ephemera--offer additional testimo - ny to the seriousness with which he regards his materials and, yes, the color black.

 

Not surprisingly, then, Phee has subtitled his recent body of work “The Black Path,” a grouping of canvases that numbers, at the most recent counting, over one-hundred. What impels an artist to explore a single artistic element with such tenacity?

 

Native traditions leave their mark. Having been born and raised in [city?], Phee can’t help but have jipilmuk as part of his cultural DNA. Jipilmuk is a distinctly Korean construct, being an amalgamation of the words for paper (ji), brush (pil) and ink (muk). Phee is wise to the symbolism black holds in Korean culture-- chief among them, mortality and dignity, as well as authority and its domin - ion--and combines them with concerns that are more hands-on in nature. It’s not too much of a leap, I think, to connect muk with the time Phee spent in New York City: the gritty environs of Brooklyn, say, where he pursued his studies in art at Pratt Institute. That, and it’s where he discovered black gesso.

 

How do we read a painting like, to take a piece at random, Untitled; The Black Path CXVII (2022) The canvas is modest in scale--it measures 90.9 by 72.7 cen - timeters--but its format corresponds, roughly, to the human form. This presenta - tional aspect is reiterated by the picture’s “portrait” orientation, a decision that is, to one degree or another, inherently confrontational. The composition is bisected horizontally just a smidgen above the halfway mark. The upper portion of the canvas is a matte field of black, a surface both velvety and permeable. The bottom contains an aggressive cascade of white, gray and black, a run of washy acrylic that takes on a metallic cast.

 

The image is tersely contrived, a take-it-or-leave it juxtaposition of material and approach. Which begs the question: though we know how the picture has been made, what, exactly, is the nature of the image?

 

Phee has long acknowledged a debt to Abstract Expressionism. (The hieratic approach to composition and color bears some resemblance to the art of Mark Rothko.) The stark, no-nonsense physicality of the work points, also, to the in - fluence of Minimalism. Phee follows up on the psychological interiority typical of the former and the brute concreteness of the latter, but invests them with currents that are both embodied within the canvas and range afield from its parameters. Notwithstanding the daunting strictures he’s set for himself, Phee taps into the far-ranging power of metaphor.

 

Phee’s textures are, I think, a case study in how ineradicable the touch and place can be to an artist’s vision. Whether they are distressed, burnished, cracked or scabbed, Phee’s surfaces achieve a tangibility that evokes the bodily as well as the natural world. Skin is an analogue for the pictures--a fragile one, to be sure--as is the unfeeling gravity of stone. Phee’s layering of materials, by turns, is addi - tive and destructive, simultaneously an avowal of purpose and a questioning of it. You don’t need to know that Phee came of age in the city to intuit the urban character of his hardscrabble paintings: it’s there to glean from the work itself.

 

Phee’s use of black--somewhat monomaniacal, invariably elegant--hints at a pursuit that is rather dour in its philosophical implications. His writing on the work is rife with existential tangents, stern reveries, and a dogged insistence that painting “can act as the catalyst [to] promote the subjective consciousness of all individuals.” What this portends is that the pictures, notwithstanding their in - tense physicality, provide a conduit--a kind of mirror, really--within which the viewer is able to confront his or her own questions about the nature and worth of experience. Though freighted with responsibility, the path Phee offers is also marked by generosity. Not every artist treats his audience with respect. Phee is one of them and his paintings evince of rare and welcome integrity.

가장 가변적이고 성가신 색, 블랙

마리오 네이브스 / 작가, 평론가, 교수

 

모든 색은 잠재력과 단점을 갖고 있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나면 어떠한 색에는 때때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어떠한 색에 완전한 의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 이다. 빨간색은 내가 지구 위 어디에 발을 디뎠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상징성을 가진다. 보라색 역시 지성에 호소할 만한 함축적 의미들을 내포할 수 있다. 색상 환 속의 어느 색이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색상환 안에는 검정이나 그 반대인 흰색이 없다. 물리학에 꽤 친숙한 사람이라면 가시광선 스펙트럼 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흑과 백은 아예 ‘색’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화가들은 팔레트 위에 명암 조절을 돕기 위해 고고히 자리잡고-차지하고-이목을 이끄는 검정과 흰색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들이 이 색들의 미적 효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검정을 별로 좋아 하지 않았고, 반면에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모든 색깔의 여왕’이라 불렀으며, 앙리 마티스는 검정의 힘을 음악에 비유했다. 검정은 피정원의 그림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도, 눈을 돌릴 수 없는 존재감을 지녔다. 물론 작가의 작품 속엔 캔버스 위에 나타나는 ‘영롱한 금 덩어리’들, 그리고 위로 흐르는 녹슨 진갈색의 흔적처럼 다른 색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검정은 피정원의 화면을 지배하는, 작가가 결코 가볍게 여기는 색조가 아니다. 캔버스 위에서 수행된 일련의 연구작 은 표면과 색의 변조 에 대해 질감과 점성을 가지고 실험한 피정원의 벅찰 만큼 긴 ‘인벤토리’이다. 노트, 흔적, 얼룩과 같은 에피메라(ephemera, 잠깐 쓰이다 버려지는 것들의 모음-옮긴이)가 축적된 그의 스케치북은 작가가 자신의 재료와 검정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지에 대해 부연해 설명한다. 그래서 작가가 그의 최신작에 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놀랍지 않다.

이 부제는 벌써 100개의 수가 넘는 그의 회화 연작의 일부다. 무엇이 피정원에게 이런 집념을 갖고 하나의 예술적 요소를 탐구하도록 자극한 것일까? 전통은 그 흔적을 남긴다.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나고 자란 피정원에게 ‘지필 묵’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DNA의 일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필묵’은 종이 (지), 붓(필), 먹(묵)을 아울러 이르는 표현으로서,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 피정원은 한국 문화에서 검정이 갖는 상징성-죽음과 존엄성, 권위와 지배력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더 실제적인 문제와 결합하는 재기를 보여준다. 작가가 검은색 젯소를 발견한 장소인 프랫 인스티튜드가 위치한, 웬만한 투지와 용기 없이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브루클린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가 뉴욕에서 보낸 시간을 ‘먹’과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피정원의 그림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중 하나를 골라서 살펴 보자면, (2022)는 세로 90.9cm에 가로 72.7cm 의 작품으로, 크기는 보통이지만 형태는 대략 인간 몸의 형태와 일치한다. 이러한 표상적 요소는 그림의 “초상화”적 성향에 의해 강조되며, 방향성은 어느 정도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성향을 띤다. 구도적으로는 중심선에서 살짝 위로부터 상・하단으로 수평 이등분되어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상단부는 벨벳 처럼 부드럽고 투과성 있는 무광택 검은색, 하단부는 금속 주조를 띠는 흰색, 회색, 검은색의 아크릴 물감의 줄기들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교섭의 여지가 없는 듯 작가가 병치시켜 놓은 매체와 제작 방식을 통해 간결하게 고안된 화상(畫像)을 보고 있으니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다고 한들 이 이미지의 본질은 정확히 무엇일까?

 

정원은 오랫동안 추상적 표현주의에 대한 ‘빚’을 인정해 왔다. 구도와 색의 일종의 우위를 가리는 접근은 마크 로스코의 방식과 유사하다. 작품의 냉엄하고 간단명료한 물질성 역시 미니멀리즘의 영향으로 보인다. 작가는 전자의 전형적 인 심리적 내면성과 후자의 극도의 구체성을 계승하면서도, 그 범위의 한도에서 벗어난 오늘날의 흐름을 화면 내에 구체화한다. 스스로 설정한 위압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피정원은 광범위한 은유의 힘을 이용한다.

 

피정원이 구현한 화면 속의 질감은 창작자에게 ‘감촉’과 ‘장소’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한 변증이다. 그들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든, 번들거리든, 금이 가든, 딱지가 있든 간에, 작가의 작품 위 표면은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육체의 감각을 상기시키는 실감성을 이룬다. 이 표면은 마치 무심한 중력에 못 이겨 떨어지는 돌처럼 깨져버리기 쉬운 화면과 같다. 피정원이 교대로 쌓아 올린 겹겹의 층은 부가적이고 파괴적이며, 목적에 대한 공언(公言)을 속삭임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관람객이 작가가 도심에서 자라온 환경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작품 속의 척박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도시적 특성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딘가 단조롭지만, 항상 우아한 피정원의 검정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다소 엄격하게 읽힌다. 그의 작업 노트는 실존적 접선, 엄중한 몽상, 그리고 그림이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을 촉진하는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완강한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이 가진 강렬한 물질성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경험의 본질과 가치에 관한 질문에 직면할 수 있는 통로-거울-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책임이 막중하지만, 그가 안내하는 길은 관대 하기도 하다. 모든 작가가 관람객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을 존중 하는 피정원의 작품 속 진실함은 귀중하고 희귀하고 반갑다.

마리오 나베즈 (Mario Naves)는 뉴욕에 거주하며 일하는 작가, 교육자 그리고 예술 가다. 엘리자베스 해리스 갤러리의 전속 작가인 나베즈는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슬레이트 (Slate), 뉴 크리 테리온 (The New Criterion), 뉴욕 옵서버 (The New York Observer), 스펙테이터 월드 등 (The Spectator World)에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는 현재 뉴욕 선(The New York Sun)의 영화 비평가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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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Naves / American artist, art critic,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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